니제르(Republic of Niger) 국기
‘니제르’로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Niger' 니제르 공화국입니다.
국명은 나이저강에서 유래하는데, 니제르는 '큰 하천'이라는 뜻입니다.
니제르의 국기는 위에서부터 오렌지색, 하얀색,초록색의 3색기이며 중앙에 오렌지색 원이 있습니다.
오렌지색은 독립혁명과 니제르 북쪽 경계선을 이루는 사하라 사막을 하얀색은 평화, 순수, 희망과 사바나지역을
초록색은 발전과 번영을 의미하며 푸른 초원을 상징합니다. 가운데 오랜지색 원은 태양을 나타냅니다.
니제르 기본정보 (위치, 면적, 인구, GDP, 종족, 언어, 종교)
위치 & 면적 & 수도
니제르는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수도는 니아메(Niamey)이며 남쪽으로는 베냉과 나이지리아,
동쪽으로는 차드, 북쪽으로는 리비아, 알제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국토면적은 약 126만 제곱킬로미터로 프랑스 국토면적의 약 2배정도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인구 & GDP
인구는 2019 년 기준으로 약 2300 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인구수와 비슷해, 넓은 국토에 비해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니제르의 1년 총 GDP는 2017년 기준 약 81억 달러. 이는 세계 139위로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는 몰도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종족 & 언어 & 종교
니제르의 민족구성은 하우사족이 50% 이상을 차지하며, 그 외 제르마족, 푸라족, 투아레그족 등의 여러 민족이 있습니다. 니제르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하우사어, 아랍어도 사용되고 있는 편입니다.
주민의 약 80%가 이슬람교도, 20%가 그리스도교도이고 그 외 전통적인 부족종교를 믿습니다.
니제르 역사
니제르는 북부의 베르베르족, 남부의 아프리카 제족이 서로 접하는 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출신인 투아레그족이 오랫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의 마그리브 지방과의 대상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왕국을 거치면서도 이 지역에 정식으로 국가가 성립되지는 못했습니다.
니제르 지역이 본격적으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54년과 1870년 두 차례에 걸친 독일인들의 탐사부터였습니다. 그 후로 1891년 프랑스군대가 아프리카의 대서양쪽에 면한 세네갈에서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나이저강을 건너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하는데요.
당시 탐험에 기초하여 프랑스는 1897년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하고 영토로 편입, 1906년 영국-프랑스 협정으로 현재의 나이지리아와 국경이 분리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나이지리아는 영국령으로, 니제르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편입되었습니다. 1926년 인근의 부르키나파소의 영토 일부를 병합했으나, 1947년 부르키나파소의 부활로 인해 오늘날의 영토로 축소되었습니다.
프랑스 통치 시대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식민지 여러 국가와 비슷한 역사를 거쳤고, 민족주의 독립운동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상태로 1958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공화국이었다가 1960년 8월 완전 독립하여 UN에 가입했습니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다수 종족을 결합한 통일국가로 안정된 정치발전을 이룩한 니제르는, 국민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임기 5년의 의원 83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국민의회를 구성했습니다.
초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H.디오리 대통령은 재선을 거쳐 1970년에 3선이 되었으나, 1974년 육군참모장 세이니 쿤체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추방되고 쿤체를 수반으로 하는 강력한 1인 독제체제가 출현하였습니다.
1987년 쿤체가 지병으로 사망한 후, 신헌법을 채택하여 대통령제 공화국이 된 니제르는 그 후로도 2차례 군사쿠데타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정국이 불안했습니다.
니제르 정치
현재 니제르는 1999년 채택한 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제 공화국입니다.
2011년 4월에 실시한 대통령, 국민의회 선거에서 마하마두 이수푸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맡고 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비동맹 중립을 표방하면서, 최근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과의 관계 긴밀화에 노력하고 있고 서아프리카 국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니제르 경제와 산업
니제르는 남부 사바나 지역에서 잡곡과 땅콩· 목화 등이 재배되고, 북부 사막지대에서 유목을 하여, 국민총생산의
약 40%는 농업생산으로 충당됩니다.
별다른 부존자원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농목축업 등 1차산업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니제르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1인당 국민소득도 489 달러로 상당히 낮습니다.
1970년대에 우라늄 수출이 시작되어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정부의 무리한 투자실패와 국제 우라늄시세 하락으로 인해 경제호황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974년 이래 가뭄으로 수출용 농산물인 땅콩의 생산량이 급감해,
경제적 타격과 식량난을 겪게 됩니다.
불안한 정국과 빈약한 경제구조로 인해 니제르는 1987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으로 바뀌었고, 최근까지도 서방국가의 대외원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니제르 환경 & 기후
바다에서 650km 떨어진 니제르는 아프리카 내륙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사하라 사막과 접하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7개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국경선의 길이만 해도 5,70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니제르는 매우 무덥고 건조한 전형적인 아열대 기후가 나타납니다.
국토의 80%가 사막으로 이루어진 니제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균기온이 30도이고, 여름철인 3월과 7월 사이에는 낮기온이 50도에 육박할 정도라고 합니다.
리비아, 알제리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부에는 제법 높은 고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해발고도 300m 수준의 평탄지가 많습니다.
국토 남단의 나이저강 유역이 그나마 사바나 기후지역으로 농경이 가능해, 인구의 90%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니제르 문화 - 교육/의료 수준, 축제
니제르의 주민의 약 20%가 유목민이고, 도시 인구는 5% 정도에 불과합니다.
취학률도 매우 낮아, 자연스럽게 문맹률은 높은 편입니다. 그나마 프랑스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현대들어 교육시설이 차츰 확대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의료수준도 매우 낮은 편인데다, 그마저도 도시에 집중되어 있어 시골 주민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때문에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고 평균수명도 43세로 매우 낮습니다.
니제르에서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행사인 큐어 살레(Cure Salee)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걸로 유명합니다.
우기가 끝나는 시기인 매년 9월, 니제르의 각 지방마다 열리는 큐어 살레는 니제르에서 가장 큰 축제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매년 바뀌지만 대체적으로 9월 마지막주에 시작해 일주일간 이어집니다. 큐어 살레의 하이라이트는 유목민족인 워다베족이 펼치는 축제인 게레올(Gerewol)입니다.
워다베족 남성들이 축제기간동안 여성처럼 분장을 하여 미인 선발대회를 개최하는데요.
워다베족 남성들은 이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 위해 몇 시간씩 분장을 하고,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자신만의 매력을 뽐낸다고 합니다.
니제르 유명 인물 - 오마로우 간다 (Oumarou Ganda)
니제르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는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오마로우 간다’Oumarou Ganda 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1960-70대 아프리카 영화가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데 공헌했습니다.
간다는 1935년 니제르의 수도 니아메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기 시절을 니제르에서 보낸 그는 16세의 나이로
1951년부터 55년까지 프랑스 극동 원정대의 군대에 입영되었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아시아에서 2년을 보낸 후 니제르로 돌아온 간다는 코트디부아르로 이주하여, 아비장 항만에서 장거리 항해사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인류학자이며 영화 제작자인 장 루슈(Jean Rouch)를 만나게 됩니다.
장 루슈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인류학을 연구하며 더불어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간다는 장 루슈의 영화제작일을 도우면서 조금씩 영화일을 배우게 됩니다. 단역으로 시작해 점차 주연을 맡기도 하면서 경험을 쌓은 뒤, 몇 해가 지나서는 니아메로 돌아온 간다는 본격적으로 영화연출과 카메라 및 사운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는 인도차이나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8년 45분 러닝타임의 영화 <카바스카보> Cabascabo 를 제작하게 됩니다.
영화는 인도차이나로 간 프랑스 식민지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간 동료와 인간관계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카바스카보는 제 6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오마로우 간다는 1979년대에도 활발하게 영화 제작을 계속했으며, 그 중 많은 작품이 국제적인 찬사를 받게 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일부다처제와 강제 결혼을 다루고 있는 아프리카 권력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1970년작 Le Wazzou Polygame 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 3세계 칸 영화제로 불리는 FESPACO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한 간다는 1981 년 1월 1일에 영화 제작 도중, 심장 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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