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의 아들이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부유 하게 자랐습니다. 얼마나 부유 했냐면 1953년 찢어지기 가난했던 대한민국에서 일본 도쿄로 대학교도 아니고 초등학교로 유학을 갈 정도였습니다.
그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이유는 아버지 이병철 선대 회장 의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삶이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건희 회장의 말이 따르면 일본에 가니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생각을 많이 한 때는 민족 차별을 당하며 선택했던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걸 다 느꼈다 라고 말한 바 있었고 이 때문에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본에서 인종차별 까지 당했던 이건희 회장이었고, 일본이 싫을 법도 했지만 학창시절 그 누구보다 일본을 배우고자 했던 사람이었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 또한 탁월했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이건희 회장이 느닷없이 홍 의원에게 " 네 일본어 배워나라 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 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공부 좀 했던 학생들도 반일 감정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홍 위원은 "그걸 뭐하러 배우노?" 라고 되 받아 쳤더니 이건희 회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본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게 된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국토가 폭격으로 산산조각 나고 심지어 핵폭탄 까지 맞았던 일분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찢어지게 가난했던 일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한때는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국이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홍의원은 솔직히 그때는 건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1학년짜리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놀랍다고 혀를 내두를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건희 회장 의 1974년 한국 반도체 인수 결정 또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건희 회장 의 안목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 입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가치는 알고 있었지만 반도체 산업은 인구 1억 이상 GNP $10,000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이 되어야만 가능한 사업 이였기 때문에 아직 한국에게는 이르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성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야말로 삼성전자의 미래 씨앗이 될 것이라 확신하여 개인 사재로 과감히 선행 투자를 하여
1974년 한국 반도체 를 인수하게 됩니다.
또한 이건희 회장은 끊임없이 고 이병철 회장을 설득하여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생각을 바꾸는데 성공하여 삼성그룹의 적극적인 투자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 결과 현재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 일본
크게 앞질렀고, 2012년 에 이르러서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 일본은 반도체 부문에서 힘이 빠졌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번외로 1974년 이건희 회장이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던 날 한국은 일본과의 반도체 기술 격차가 27년이나 났을 정도로 아주 뒤쳐져 있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걱정 왕이었습니다
항상그룹 회의를 할 때마다 심심하면 위기 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고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걱정,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 이렇게 항상 걱정만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2005년 삼성 휴대폰이 처음 1억대 판매를 돌파하며 노키아에 이어 글로버 2위 업체로 올라 설때도 이건희 회장은 밀라노 전략 회의에서 임직원들에게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 라고 쓴 소리를 쏟아내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삼성은 고비의 순간에도 이를 디딤돌로 삼아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위기를 내다보고 비상경영을 추진한 덕분에 IMF 외환위로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줄줄이 낙마할때도 삼성만큼은 IMF전보다 되레 순이익이 늘었을 정도로 건재햇습니다.
그렇게 위기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고 걱정만 하던 이건희 회장의 명언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이 선언 이후 삼성은 끊임없이 미래 산업을 개척해 반도체, 스마트폰, 티비등 첨단 제품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1위에 오르며 삼성을 대기업이 아닌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영화광입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냐면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근 3년 동안 봤던 영화만 1300여 편이 넘는다고 합니다.
번외로 이건희 회장은 대개 일반 사람들은 영화를 감상할 떄면 주인공만 너무 치중해서 본다.
하지만 등장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입장에서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보게 된다. 라며 자신만의 영화 감상법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개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가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거짓말 안하고 배신할 줄 모르는 충직함 "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스포츠 광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레슬링을 무척 좋아해서 고교떄는 레슬링부에 들어가기도 했을 정도였고, 웰터급 선수로 전국 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건희 회장은 훗날 레슬링협회 회장이 되기도 했으며 취임한 이후 적극적인 지원으로 비인기 종목이었던 레슬링을 한국 스포츠의 매달 밭으로 가꾸었습니다.
그렇게 88서울 올림픽 때 레슬링으로만 딴 메달만 금2 은2 동메달 5개였습니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은 1991년 12월 23일 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국제 올림픽운동과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림픽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마니아입니다.
대한민국 부자 1위답게 이건희 회장 명의로 등록된 1억원 이상 수입 자동차만 총 124대나 됩니다. 124대의 차량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대 차량은 부카티 베이론으로 그 가격만 26억 원이 넘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특유의 귀여운 외모로 쁘띠거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건희 회장의 '이건희'라는 이름 덕분에 여러 가지 별명이 생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인사하는거니? 내심흡족한거니? 배나온거니? 굳은거니? 불쾌한거니?
안경벗는거니?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별명이 이름에서 파생했습니다.
이건희 회장 근황과 건강
이건희 회장은 돌연 2014년 5월 급성 심경근색으로 급히 순천향대학교 서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을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삼성의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다행히도 현재는 심장기능을 포함한 신체기능은 정상으로 회복해
안정적인 상태에 있으며 하루 15~19시간 정도 깨어 있으면서 휠체어 운동을 포함한
재활치료를 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전한바 있습니다.
또한 2017년 TV조선 종합 뉴스에서도
이건희 회장이 간호사와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며
일본 유학파답게 일본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를" 보고 있는것을 봐서는
아직까지는 건강에 큰 무리가 없는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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